나홍진 감독의 영화 ‘곡성’은 2016년 개봉 이후 지금까지도 끊임없는 해석과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문제작입니다. 단순히 공포영화로 보기엔 너무 복잡하고, 너무 깊으며, 너무 낯설죠. 그 안에서 가장 큰 의문은 바로 ‘괴물’의 정체입니다. 도대체 그것은 누구였을까요?
목 차
1. 눈앞에 보이지만 설명할 수 없는 존재 (시청자 시점의 괴물)
2. 곡성 속 종교적 상징과 괴물의 의미 (샤머니즘 vs 기독교)
3. 괴물은 실재하지 않아도 공포는 존재한다 (심리적 해석과 감정)
1. 눈앞에 보이지만 설명할 수 없는 존재 (시청자 시점의 괴물)
‘곡성’을 처음 본 관객은 아마 이렇게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뭐지? 도대체 누가 나쁜 놈이야?” 영화는 전통적인 스릴러나 공포 장르처럼 명확한 악당을 제시하지 않아요. 대신 관객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의심하게 됩니다. 누가 진짜 악한 존재인지, 누구의 말이 맞는 건지, 무엇을 믿어야 할지 끊임없이 갈등하게 하죠. 그리고 그 중심에 ‘괴물’이 있습니다. 정확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존재 말입니다. 처음 등장하는 일본인 남자. 그는 숲 속에 외따로이 살고 있고, 짐승의 사체와 알 수 없는 의식을 행합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기괴하고 불쾌하죠. 하지만 그는 정작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종일관 관조적인 태도를 유지하죠. 그런데도 그의 주변에서는 연쇄적인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고, 마을 사람들은 그를 의심합니다. 이쯤 되면 관객은 ‘당연히 저 사람이 괴물이겠지’ 하고 단정하게 돼요. 하지만 그게 이 영화의 함정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무당 일광의 의식 장면이 겹쳐지고, 일본인을 찍는 장면이 나오며 관객은 다시 의심을 시작합니다. “혹시 무당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혹은 누군가 조종당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이처럼 ‘곡성’의 괴물은 실제 형체를 가지고 있지도 않고, 설명도 되지 않으며, 정체를 확정 짓기도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가장 강력한 공포로 작용합니다. 알 수 없기에 무섭고, 믿을 수 없기에 불안하며, 해석할 수 없기에 집착하게 됩니다. 곡성의 괴물은 그런 방식으로 우리 마음속에서 자라나는 ‘불안’ 그 자체입니다.
2. 곡성 속 종교적 상징과 괴물의 의미 (샤머니즘 vs 기독교)
‘곡성’은 단순히 귀신 들린 영화가 아닙니다. 영화 속에는 종교적인 충돌과 모호한 신학적 은유가 끊임없이 등장합니다. 가장 상징적인 인물은 황정민이 연기한 무당 ‘일광’입니다. 그는 우리 전통 민속신앙, 즉 샤머니즘의 존재로, 악령을 내쫓는 역할을 맡고 있죠. 하지만 그가 진짜 ‘선’인지, 아니면 거짓 무당인지 알 수 없습니다. 영화 속 의식 장면은 오히려 공포감을 증폭시키고, 마을 사람들조차 그를 불신하게 만듭니다. 결국 일광도 도망쳐 버리며 무력함을 드러냅니다. 반면, 일본인 남성은 서양적 악마를 연상시킵니다. 뿔 달린 악마의 형상을 드러내는 사진, 죽은 사람을 촬영해 수집하는 장면은 모두 기독교적 ‘사탄’의 속성과 닮아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를 직접적으로 ‘악마’라고 말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는 피해자인 듯, 때로는 중립자처럼 보이기도 하죠. 여기에 또 다른 인물인 ‘흰옷의 여자’는 마치 천사처럼 보이지만, 결말부에서는 그녀조차도 신뢰할 수 없는 존재로 바뀝니다. 이처럼 영화는 종교 간 대결 구도를 명확히 하면서도, 어떤 종교도 정답을 제시하지 않아요. 그래서 괴물의 정체는 ‘종교가 설명하지 못하는 세계’ 혹은 ‘종교에 대한 인간의 해석’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영화 속 종구는 무당의 말도, 딸의 말도, 여자 귀신의 경고도 믿지 못하고 결국 모든 걸 잃죠. 이처럼 괴물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신앙과 불신 사이에서 생겨난 내면의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결국 곡성의 괴물은 실체 있는 악이 아니라, 인간의 신앙과 불신 사이에서 태어난 그림자 같은 존재입니다.
3. 괴물은 실재하지 않아도 공포는 존재한다 (심리적 해석과 감정)
우리는 공포영화를 볼 때 보통은 어떤 존재의 ‘실체’를 찾으려 합니다. 귀신이냐, 살인마냐, 아니면 악령이냐. 하지만 ‘곡성’은 그 기대를 철저히 배반합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에게 "정확히는 알 수 없다"는 태도를 유지하죠. 그것은 불친절한 연출처럼 보일 수 있지만, 오히려 진짜 공포는 그런 ‘모름’에서 비롯됩니다. 관객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괴물이 뭐였는지’ 결론을 내릴 수 없고, 그 불확실성은 마음에 오래 남습니다. 감독 나홍진은 인터뷰에서 "확정 짓지 않기 위해 매우 조심스러웠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말처럼 영화 속 괴물은 존재하되 실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을 사람들의 공포, 종구의 불안, 무당의 무력함, 흰옷의 여인의 미묘한 말투처럼 ‘감정’의 층위에서 괴물은 계속 변형됩니다. 이것이 이 영화가 단순한 오컬트 영화가 아니라 심리 스릴러로 평가받는 이유입니다. 또한 괴물의 존재는 관객 자신을 투영하게 만듭니다. 누구를 믿을 것인가, 어떤 장면을 진실로 받아들일 것인가에 따라 각자의 괴물이 달라지니까요. 괴물은 일본인일 수도 있고, 무당일 수도 있으며,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혹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해석, 공포, 망상일 수도 있죠. 그래서 곡성은 무서운 영화인 동시에, 굉장히 슬픈 영화입니다. 인간이 끝까지 진실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괴물은 끝없이 자라고, 우리는 누구보다 스스로를 의심하게 됩니다.
‘곡성’의 괴물은 실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불신에서 시작된 불안, 종교적 상징을 둘러싼 해석의 충돌, 그리고 인간 감정의 파편입니다. 정답이 없기 때문에 공포는 더 깊어지고, 시간 속에서도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결국 괴물은 ‘설명되지 않음’이라는 두려움의 또 다른 이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