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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진그룹 배경으로 본 1990년대 서울 사무실 풍경

by richm300 2025. 7. 10.

2020년 개봉작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1990년대 서울의 사무실 풍경을 정밀하게 되살려낸 영화입니다. 단순한 직장물이 아니라, 그 시대 직장인들의 삶, 감정, 공기까지 담아낸 ‘공간 드라마’라 할 수 있죠. 특히 여성 사원들의 시선에서 본 조직문화는, 지금도 유효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 속엔 차별, 침묵, 연대 같은 시대의 단면들이 녹아 있으며, 우리 사회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힌트를 남깁니다.

목          차

1.  플로피디스크와 금고, 감정이 쌓인 사무실 풍경

2.  유리천장 아래에서, 우리는 묵묵히 일했다

3.  그 시절의 서울, 사무실이라는 ‘사회’의 단면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1.  플로피디스크와 금고, 감정이 쌓인 사무실 풍경

삼진그룹의 사무실을 보는 순간 이상하게 익숙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화면 속 풍경은 촌스럽고 오래된 것이지만, 묘하게 마음을 건드려요. 청록색 유선전화기, 사원증 목걸이, 14인치 CRT 모니터, 그리고 종이서류에 꾹꾹 눌러 찍던 고무도장까지. 1990년대 서울 사무실의 디테일이 화면 가득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그 시절 사무실은 지금처럼 자동화되거나 ‘디지털화’된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일이 사람 손을 거쳤고, 복사하고 정리하고 서류를 메고 뛰는 것이 일상이었죠. 지금은 버튼 몇 개로 끝나는 업무가, 그땐 사람들의 손바닥 위에서 오갔습니다. 기계보다 사람이 더 먼저 움직이던 시절, 그곳의 공기는 종이 냄새, 믹스커피 향, 고무 잉크 냄새가 뒤섞여 있었고, 그 냄새마저도 이상하게 정겨웠습니다. 직원’이라는 말보다 ‘사람’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는 시대. 영화 속 공간 구성도 무척 리얼합니다. 구불구불하게 놓인 책상, 사이사이 커피믹스가 쌓여 있는 탕비실, 그리고 ‘미스 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여성 사원들의 자리엔 항상 비품 상자나 보고서 더미가 한가득이죠. 어디를 둘러봐도 깔끔하거나 세련되진 않지만, 대신 ‘살아 있는 공간’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휴게실 벽에 걸린 표어 — “고객은 왕이다” 같은 문구조차 그 시대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어요. 가치보다는 복종, 효율보다는 질서가 우선이던 시대, 그 안에서 직원들은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켰습니다. 사무실 안에서는 계급이 곧 공기였죠. 과장님 자리는 창가 쪽, 신입은 출입문 옆. 누구나 비슷한 책상에 앉고 비슷한 유니폼을 입었지만, 그 안엔 확연한 권력 차이와 상하관계가 엄연히 존재했습니다. 복사기 하나 쓰기 위해서도 눈치를 봐야 했고, 커피 타는 순서조차 ‘암묵적인 규칙’이 존재했죠. 그런 현실을 영화는 과장하거나 비꼬지 않고, 자연스럽게 보여주기 때문에 오히려 더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아, 나도 저런 곳에서 일했었지 하고 웃으며 회상하게 만들고, 또 그 시절에 가려진 감정들까지 되새기게 만듭니다.

삼진그룹’이라는 공간은 단지 회사가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작은 사회이자, 감정이 쌓이고 부서지고 꿰매지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우리는 그 공간의 연장선 위에 앉아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  유리천장 아래에서, 우리는 묵묵히 일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전형적인 여성 서사처럼 보이지만, 실은 굉장히 현실적인 시선으로 당대의 직장 내 여성 처우를 보여줍니다. 고아성, 이솜, 박혜수가 연기한 주인공 3인은 모두 고졸 출신 계약직 여직원입니다. 그들은 회사의 중요한 일을 누구보다 많이 처리하지만, 승진이나 인사고과, 의사결정 과정에서는 철저하게 배제됩니다. 회의실 유리창 너머에서 말없이 커피를 타는 장면, 보고서를 작성한 사람이 아니라 ‘이름 올린 남자 대리’가 칭찬받는 장면 등은 유쾌하게 그려지지만, 관객의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만들죠. 이 장면들은 단순한 풍자가 아니라, 현실 그 자체로 다가옵니다. 90년대 여성 사원들이 겪어야 했던 건 단지 사회적 편견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시스템 속에 녹아든 무시와 침묵, 그리고 아무도 문제 삼지 않던 ‘당연함’이었어요. 정직원이 되기 위해 영어 점수를 따고, 회사 행사마다 웃으며 참여하며, 한 번도 불만을 내비치지 않던 이들의 분노가 터져 나올 때, 관객은 그걸 단순히 ‘페미니즘’이라는 틀로만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맞아, 저런 순간 있었지”라는 식의 공감의 기록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 영화가 전달하는 여성 서사의 힘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아주 조용한 공감에 있습니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건, 영화가 이 여성들을 ‘영웅’처럼 만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평범하고, 때로는 흔들리며, 실수도 하고 소심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손을 잡고 한 걸음 나아가는 모습이 진짜 용기처럼 느껴집니다. 스스로 대단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스스로를 믿고, 목소리를 내는 순간의 떨림이 너무도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잘 버티는 것’이 미덕이었던 시대, 여성들은 말없이 견뎠고, 회사라는 구조 안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두 배, 세 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습니다. 그런 세상을 살아낸 이들에게 ‘삼진그룹’은 단지 영화가 아닙니다. 어떤 장면은 현실보다 더 현실 같고, 어떤 대사는 아직도 귀에 맴돌죠. 유리천장 아래에서 자라난 한 세대의 이야기, ‘삼진그룹’은 그 시절을 살았던 누군가에게는 회사의 이야기이자, 인생의 이야기일 겁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여전히 지금 이곳을 살아가는 누군가의 현재진행형이기도 하죠.

3.  그 시절의 서울, 사무실이라는 ‘사회’의 단면

1995년이라는 배경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한국 사회가 경제 성장과 함께 대기업 중심 문화가 정점에 다다르던 시기였죠. 외환위기 직전의 팽창기, 그만큼 경쟁도 치열했고 조직은 강했고 질서는 위계적이었습니다. 삼진그룹의 사무실은 단지 업무를 처리하는 공간이 아니라, 그 안에서 이뤄지는 온갖 관계의 총합이자 권력, 젠더, 언어, 성실함, 눈치 같은 비공식적인 질서들이 얽히고설킨 작은 사회였습니다. 사무실 안에선 감정 표현이 금기였고, ‘일은 열심히, 존재는 조용히’가 미덕으로 여겨졌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든, 감정을 어떻게 느끼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죠. 중요한 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시키는 대로 잘하는 것. 그래서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은 지금도 종종 그 시절 사무실을 떠올리면 “일보다 관계가 더 피곤했다”라고 회상하곤 해요. 사람보다 시스템이 우선이었던 공간, 하지만 그 시스템조차 사람의 눈치와 위계에 얽매여 돌아갔던, 참 복잡한 공간이었죠. 삼진그룹의 사무실은 그렇게, 서울의 축소판처럼 기능합니다. 물리적인 공간은 좁고 숨 막히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감정의 스펙트럼은 오히려 더 넓고 진하죠. 책상과 책상 사이에는 거리가 있지만, 그 거리만큼 서로를 오해하거나 침묵으로 견뎌야 했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영화는 그런 거리감과 침묵을 섬세하게 보여줍니다. 영화 속 비정규직 여성들이 스스로를 위한 선택을 하고, 목소리를 내고, 결국 ‘서류에 이름을 남기는 사람’이 되는 이야기. 그건 단지 한 사람의 성장담이 아닙니다. 그것은 서울이라는 도시가, 그리고 한국 사회가 한 걸음씩 더 인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려 했던 역사의 일부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1990년대 서울 사무실을 정밀하게 복원해 낸 동시에,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마음까지 되살리는 작품입니다. 회색 파티션과 푸석한 형광등 아래서 하루하루를 버티던 누군가에겐 추억이고, 처음 보는 세대에겐 한 시대를 체험하게 하는 작은 타임머신입니다.

오늘도 회사를 다니는 당신이라면, 이 영화를 꼭 한번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화면 속 낡은 사무실 안에서 당신의 과거 혹은 미래가 겹쳐질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