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영화 『어쩌다 결혼』은 결혼이라는 제도와 그 안에 담긴 사회적 기대를 ‘가짜 결혼’이라는 장치를 통해 날카롭고도 유쾌하게 비틀어냅니다. 연애와 사랑보다 계약과 독립을 택한 두 인물이 벌이는 현실적 감정의 소동극은,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를 넘어 오늘날의 결혼관과 인간관계를 되짚어보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습니다. 사회적 틀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선택을 해나가는 인물들의 여정은 우리 각자의 삶에도 조용한 질문을 던집니다.
목 차
1. 사랑이 아닌 조건 – '결혼'의 다른 얼굴
2. 현대인의 연애 피로, 그 대안이 ‘계약’이라면
3. 결국은, 감정이 흘러넘친다
1. 사랑이 아닌 조건 – '결혼'의 다른 얼굴
요즘 사람들에게 ‘결혼’은 더 이상 필수나 의무가 아닌, 철저한 선택의 영역이 된 지 오래입니다. 과거엔 삶의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이제는 시작부터 질문이 던져집니다. 왜 해야 하지? 누구랑, 어떻게, 무엇을 위해? 『어쩌다 결혼』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그것도 “진짜 결혼이 아닌, 계약 결혼”이라는 꽤 도발적이고 신선한 설정으로요. 이 영화의 주인공 성석(김동욱 분)은 남들과 다릅니다. 아니, 다르다기보다 솔직하다고 해야 정확할 겁니다. 정해진 삶의 루트를 따르기보다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고 싶은 인물. 그는 부모가 원하는 정략적 결혼을 피하기 위해 ‘가짜 결혼’을 선택하고, 마찬가지로 해주(고성희 분) 역시 자신만의 삶을 방해받지 않기 위해 이 계약에 동의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필요한 목적을 위해 함께 한다”는 아주 실용적이고 차가운 전제를 바탕으로 결혼을 시작합니다. 사랑도, 감정도 없는 깔끔한 관계.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멈추지 않죠. 이 영화가 진짜 흥미로운 이유는, 결혼이라는 제도적 틀 속에서 어떻게 진짜 감정이 피어나는지를 섬세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서로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었던 이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며 조금씩 흔들리고 변화하는 모습은 마치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 그 자체와도 닮아 있습니다. 억지스러운 감정의 고조가 아니라, 작은 일상의 누적 속에서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감정이기 때문에 더 공감이 갑니다. 특히 영화가 “연애와 결혼은 과연 필연적으로 연결되는가?”라는 질문을 정면으로 던진다는 점은 인상 깊습니다. 이들의 관계는 기존 로맨틱코미디의 공식과도 다르고, 익숙한 사랑 이야기와도 거리가 있습니다. 대신 영화는 현실적이고 때로는 냉소적인 태도 속에서 진짜 ‘나’와 ‘너’를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지를 차분하게 보여줍니다. 사랑이 아닌, 존중과 공감이라는 감정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작품입니다.
2. 현대인의 연애 피로, 그 대안이 ‘계약’이라면
연애가 피곤한 시대입니다. 만나기까지도 어렵고, 만나고 나서도 어렵고, 심지어 헤어진 뒤에도 관계는 끝나지 않고 여운처럼 남아 우리의 일상을 침범하죠. 그래서일까요? 『어쩌다 결혼』 속 ‘계약 결혼’이라는 설정은 처음엔 낯설게 들리지만, 곱씹어보면 어쩐지 공감이 가고, 오히려 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해주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주는 법적·사회적 구속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사랑도, 함께하는 삶도 거부하지는 않지만, 그 모든 것에는 ‘내 삶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가 반드시 깔려야 한다고 믿죠. 이는 단순히 캐릭터 개인의 성격이나 성향이 아니라, 오늘날 많은 젊은 세대가 품고 있는 불안과 거리 두기의 감각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특히 해주라는 인물은, 현대 여성의 자율성과 감정적 경계를 얼마나 섬세하게 지켜내고자 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인물로 읽힙니다. 『어쩌다 결혼』의 가장 큰 강점은 이런 복잡한 고민과 시대적 정서를 결코 무겁지 않게, 오히려 위트 있고 유쾌하게 풀어낸다는 점입니다. 대사 하나하나에 날카로운 현실 인식이 담겨 있으면서도, 캐릭터들은 마치 농담처럼 가볍게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죠. 영화는 ‘관계의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연애를 하지 않아도, 결혼을 하지 않아도 우리는 누군가와 깊은 유대감을 맺을 수 있을까요? 감정이 없는 듯 보이는 관계는 진짜로 비어 있는 걸까요, 아니면 오히려 더 진심일 수 있을까요? 영화는 이러한 질문을 직접 말하지 않지만, 인물들의 행동과 대사를 통해 조용히 관객의 마음속에 남습니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점은, 이 영화가 사랑을 정답처럼 소비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대부분의 로맨틱코미디가 결국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해 모든 문제를 풀어내고 해피엔딩을 향해 달려가는 데 반해, 『어쩌다 결혼』은 감정보다 더 근본적인 ‘존중’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존중은 굳이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사실을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전합니다. 어쩌면 이 영화는 지금의 청춘들에게 필요한 감정의 거리감과, 관계를 대하는 새로운 태도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랑보다도, 결혼보다도, 그 사이 어딘가에서 우리가 진짜로 원하는 건 무엇인지 되묻는 영화입니다.
3. 결국은, 감정이 흘러넘친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둘 사이의 묘한 거리감입니다. 가까워질 듯 멀어지고, 멀어지는 듯 다가오는 그 간격.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이 꼭 이렇지 않나요? 계약으로 시작된 관계는 당연히 기한이 있습니다. 하지만 감정은 그렇지 않죠. 약속은 끝나도 마음은 남고, 조건은 사라져도 흔적은 계속 이어집니다. 이 영화는 그 감정의 잔재를 꽤 섬세하게 담아냅니다. 때로는 장면 없이 대사만으로, 때로는 표정 없이 침묵으로요. 김동욱과 고성희의 케미는 딱 ‘적당히 어색해서’ 더 좋습니다. 너무 가까워 보이지 않기에, 조금씩 좁혀지는 감정선이 자연스럽게 설득력을 가집니다. 둘 사이에 오가는 말투, 눈빛, 대화의 호흡이 쌓이면서 어느새 관객은 “둘이 진짜 좋아하는 거 아냐?” 하고 웃게 됩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쉽게 두 사람을 이어주지 않습니다. 그렇게 단순하지도, 판타지스럽지도 않으니까요. 오히려 영화는 결혼을 했지만 사랑하지 않고, 사랑했지만 함께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의 현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결혼을 ‘연애의 끝’으로 규정하지 않고, 하나의 형태로만 보지 않는 시선. 이 영화는 그런 시도를 통해 새로운 로맨스 장르의 가능성을 열어 보입니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사랑이란 감정이 얼마나 자유로우며, 또 얼마나 불편한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도 문득 궁금해집니다. 둘은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은 어떤 감정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그 여운이 오래 남는 이유는, 아마도 이 이야기가 단지 영화 같지 않아서일 겁니다.
『어쩌다 결혼』은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관계, 감정, 자아, 그리고 삶의 방식을 되묻는 영화입니다. 연애보다 계약, 사랑보다 독립을 택한 두 사람의 관계는 아이러니하게도 더 깊은 감정을 건드리며, 관객에게 작지만 날카로운 질문을 남깁니다. 지금, 관계의 의미를 고민하고 있다면 이 영화를 꼭 추천드립니다.